맘에 드는.....

한일합방........?

The Dreaming 2020. 1. 13. 15:42



일본은 메이지유신 초기에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에서 이미 한국을 병탄(倂呑)할 뜻을 표명했다.

정한론은 서양 세력의 동양 진출이란 새로운 시대 상황에서

일본이 살아나려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먼저 한반도를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영토 침략 야욕이 물씬 풍기는 용어이다.

1873년 일본의 이와쿠라(岩倉) 사절단각주1)

구미 지역을 시찰하면서 새 국제법 질서 아래서는 노골적으로 침략성을 드러낸 이런 용어를 사용할 수 없음을 알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간 천황과의 관계로 정치적 비중을 높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대표적 정한론자로 몰아 축출한 다음 공식적으로는 이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 소멸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본의 식자나 정객들은

조선이 조만간 강대한 이웃나라, 즉 러시아나 일본에게 합쳐지는 것이 당연한 순서라고 보고,

동양 평화를 위해 그 주체는 마땅히 일본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런 인식 아래 사회적으로는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과 같은 주장이 나오고,

일본 정부에서는 ‘대한정책(對韓政策)’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그해 말 일본의 국제법 학자 도미즈 히론도(戶水寬人)는

『국제법잡지(國際法雜誌)』에 발표한 「조선의 처분」이라는 글에서,

일본은 영국의 이집트에 대한 정책을 배우기보다

조선을 “진(眞)의 영토”로 삼는 것을 최선책으로 삼아야 하며,

보호국화는 그것으로 가는 한 과정일 뿐이라고 논설했다.

일본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한국병합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취해진 부득이한 결과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정한론 이래의 경위로 보면 그것은 침략주의를 은폐하려는 기만적 해석에 불과하다.

일본의 한국 병탄은 의도된 것으로,

이를테면 정한론의 완전한 실현이다.

1905년 11월 보호국화를 성취한 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혼령을 부르면서

당신이 이루지 못한 일을 우리가 이루었다며 축배를 들었다.


조약 강제의 경위

1907년 6월 헤이그 평화회의 특사파견사건이 일어난 뒤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국병합 문제를 공식적으로 처음 거론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참석한 내각과 원로 연석회의에 제안된 첫 번째 검토안은

한국 황제가 일본 황제에게 양위(讓位)하는 것이었다.

이 안에 대해 당시 참석자 전원은 이번에 실천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일본이 제시하는 협약에 대해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 않을 때는

‘합병의 결심’을 한다는 것으로 조건을 달았다.

연석회의는 현 한국 황제를 퇴위시키고 황태자를 신(新) 황제로 즉위시킨 다음,

통감이 관백(關白, 섭정)의 자격으로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감독하면서

각 부의 대신과 차관으로 일본인을 기용하는 것을 최종 대책으로 확정지었다.


이 대책은 곧 1907년 7월 22일의 황제의 강제 퇴위,

24일의 ‘한일협약’(정미조약)의 강제 조인으로 실천에 옮겨졌다.

그리고 만약 이런 계획이 실현되지 못할 때는 바로 병합 조치에 들어간다는 조건이 붙었다.각주2)


일본 정부는 한국 황제를 강제로 교체하면서

조칙을 위조해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그리고 독차(毒茶)사건각주3) 으로 심신장애 증세에 빠진 신 황제(순종 황제)를 창덕궁에 유폐시키고

 통감이 섭정으로 한국을 통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전국 곳곳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일본 정부 안에서 병합론이 힘을 받았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자치육성정책’을 앞세워 조선의 보호국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그것이 국제 여론상 모양새가 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의병활동이 갈수록 심해지자 병합 단행의 주장을 더 이상 누를 수 없었다.

그는 1909년 4월에 ‘일한일가설(日韓一家說)’을 발설하며 사실상 병합론에 굴복했다. 그

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의병장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대사건이 발생하면서

병합론은 반석 위에 올랐다.

일본은 병합 단행으로 방향을 세우고서도 다시 한 번 국제적 이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은

국제언론을 통해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일뿐더러 한국인도 바라는 것으로 선전되었다.

따라서 한국인이 일본에 병합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다시 한 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1909년 12월 21일 일진회가 앞잡이가 되어 ‘한일합방’을 건의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가 나오자 수많은 애국단체가 곧 반대집회를 열었고,

또 항일의병 전선도 달아올랐다.

일본 정부는 이듬해인 1910년 5월

데라우치 육군대신을 통감으로 임명해 병합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시켰다.

6월 초 한국 문제 전문 고급 관료들로 한국병합준비위원회를 결성해

병합에 필요한 절차와 문건을 모두 준비하게 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 대한제국의 친일 괴뢰내각으로부터 경찰권을 이양받는 경찰권 위탁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통감 데라우치는 1910년 7월 서울에 부임해 본국 정부와의 긴밀한 연락 속에

8월 22일 병합에 관한 조약을 조인시키고,

29일 이를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들을 공포했다.

합방과 병합의 차이

일본의 한국 국권 탈취는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그 군사력을 배경으로 추진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형식과 절차에 관한 국제 관례를 무시했다.

‘의정서’(1904. 2. 23), ‘제1차 일한협약’(1904. 8. 22), ‘신협약’(제2차 일한협약, 1905. 11. 17), ‘한일협약’(1907. 7. 24) 등은

모두 국권에 관련된 조약이기 때문에 정식조약의 형식과 절차를 갖추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전권위원 위임과 비준서 교환 등의 정식 절차를 밟으면

한국 측의 강한 반발로 성사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주무대신이 서명하는 약식 조약의 형식을 택했다.

한국병합준비위원회는

한국 측이 사용할 전권위원 위임장과 비준서에 해당하는 한국 황제의 공포 조칙까지 준비했고,

데라우치는 그것들을 가지고 1910년 7월 하순에 부임했다.

1910년 8월 18일 통감 데라우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이번에도 전처럼 약식으로 처리해버릴 수 있지만 양국의 영원한 우호를 위해 모든 요건을 갖추고자 하니

적극 협조하라고 요구했다.

따라서 일본이 강요한 조약 가운데 이것만 유일하게 정식조약의 형식을 취했다.

순종 황제는 강압에 못 이겨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에는 서명 날인했지만 비준서에 해당하는 공포 조칙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비준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조약의 명칭으로 병합조약과 합방조약이 섞여 쓰이고 있다. 강제된 조약에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용어를 잘못 사용해서 사건의 성격을 잘못 알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일본 측이 공식적으로 취한 이 조약의 명칭은 ‘한국병합조약’이다.

준비위원회의 명칭이 그랬고,

해당 조약문의 전문(前文)에는 “양국 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한다”라고 쓰여 있다.

합방조약이란 용어는 당시 일본 정부가 기피하던 것이다.

합방은 대등한 나라로서의 일본과 한국이 하나로 합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09년 12월 일진회의 선언서가 취한 것이 바로 ‘연방적 합방’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바란 것은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흡수 통합하는 형태였다.

일진회의 합방 제안은 일본 낭인조직인 흑룡회(黑龍會)의 지원을 받은 것이지만,

흑룡회는 이후 일본 정부의 방침이 정해진 뒤로는 더 이상 합방론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면 조약을 강요당한 한국의 입장에서 취할 용어는 무엇인가?

일본이 정한 대로 이 조약을 ‘한국병합조약’이라고 한다면

병합의 사실 자체를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의 성립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 조약을 얘기해야 할 때 부를 수 있는 적절한 용어는 무엇일까?

첫째로 그 강제성을 드러낸 표현으로 ‘병합늑약(倂合勒約)’이 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합병늑약’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경우 두 나라 이름을 앞에 넣은 ‘한일합병늑약’이란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

‘병합’ 또는 ‘합병’은 어디까지나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흡수 통합하는 것이므로,

두 나라 이름을 병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일합병조약’이란 명칭은 성립하기 어렵다.

다른 하나로는 이 조약을 강요당한 당사자였던 순종 황제가 사용한 “소위 인준(認准)과 양국(讓國)의 조칙”이란 표현이 주목된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 26일 임종을 앞두고 자신이 이 조약을 승인하지 않은 사실을 밝히면서

해당 문건들에 대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

‘소위(이른바)’란 표현에는 조약문에 대한 인준을 자신이 하지 않았고

나라를 내주는 내용의 조칙도 자신이 승인하지 않은 것으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측이 말하는 것이란 점이 함축되어 있다.

이를 따르면 ‘소위 한국병합조약’이란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소위 한일병합조약’은 성립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1910년 8월 22일에 강제로 체결된 한국병합에 관한 강제 조약에 대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은 ‘한국병합늑약’과 ‘이른바 한국병합조약’ 두 가지이다.

반면에 ‘한일합방조약’이나 ‘한일병합(합병)조약’은 사건의 본질에 부적절한 표현이므로 취할 것이 못 된다.

이런 변별이, 이 조약이 유효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이 조약도 그 일방적 강제 및 순종 황제의 비준 거부로 인해,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한일 병합 조약의 한국어 원문

1910년 8월 29일에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되있는 한일 병합 조약의 한국어 원문이다.